가족 이야기

덕수궁에서 만난 마루

sunnypark 2014. 3. 2. 08:03

손자의 봄 방학 동안 이곳저곳을 두루 함께 다니기로 작정 했던 터라, 참에 덕수궁  한국 회화 100년전 구경도 같이 하기로 했다.

지하철을 타자마자 잠이 든 손자를 경로석에 앉혀 놓으니 고부리고 잠든 것이 가여운 생각이 든다.

어미가 인천에 약국을 내면서 맡기고 간 반년동안,

우리 식구 넷이 달라붙어서 밤에는 우리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 털 알러지 대문에 고모가 데려가 재우고,

아침저녁 밥은 우리 집에 데려와 먹인다. 왔다 갔다 수선을 떨고 있는 게  예삿일이 아니다.

 

자던 손자를 깨워 들어 간 전시회장엔 벌써 많은 관람객이 그림들 앞에 서서 탄성을 질러 대고 있었다.

나도 어느덧 60년 전 내 고향 하한정에 와 있다. 1930년대 김기창 화백의'가을'속에는

나를 무척 귀여워했던 뒷집 이숙이 누나가 뒸골 밭으로 가을걷이 하러 가신 아재 점심을 담아 이고 동생을 업고 간다.

같이 가자 졸라대던 나를 앞세우고 간다. 나는 수숫대 하나를 낫으로 잘라 들고 우쭐대며 앞서서 가고 있다.

누나 등 뒤에서 놀던 섭이가 금새 목을 늘어뜨리고 깊은 잠이 들어있다.

 

아~ 여기는 배운성의 '가족도' 속 우리 집일세!.

할매가 돌쟁이 록이를 안고 앉아 계시는 뒤에는 막내 삼촌 내외랑 녹이네 외삼촌도 와 계시네.사랑채 문지방 너머엔 할배가  계시는데,~

우와~!!!

맨 앞줄 할매 앞에는 꿈에서만이라도 한번 만나보고 싶었던 마루가 서 있다!

마루는 우리집 개 이름이다.

언젠가 부엌문으로 들어 온 길 잃은 마루가

어느덧 우리 식구가 되어 우리를 지켜 주고 있었다.

마루는 식구들 중에 중학생이던 팔석이 아재를 제일 좋아 했는데,아재

주머니에는 어디서 났는지 늘 초콜릿이나 찐 우유 같은 구호물자가 들어 있어

나와 마루를 기쁘게 했다.

 

그날은 몹시 무더운 여름날이었다.

오전반을 마치고 집으로 오던 동구 밖에 여느 때와는 다르게

달려 와 반기던 마루가 안 보인다.

팔석이 아잴 따라 갔나?

배고프고 지친 내 십리 학교 길, 나를 반기며 기다려 주던 마루가 없다!

불길한 생각으로 집에 가 보니, 아니나 다를까,

문중 어른들이 모여 계 가리 준비가 한창인데, 마루를 잡아넣을 큰 가마솥에 장작불을 지피고,

올가미 씌운 마루를 마악 공중에 매 달고 몽둥이질을 하려던 찰라였다.

그때였다, 마루의 눈이 마당에 들어 선 나를 발견하고서는 혼신의 힘을 다해 발버둥 치는 게 아닌가!

그 바람에 올가미 끈 잡은 어른 손도 맥없이 풀어져 마루를 놓치고 말았는데,

그래도 착한 마루는 멀리 도망가지도 않고, 저만치서 우리 쪽을 보고 있었다.

“승회야, 니가 가서 마루를 불러 온나. 니가 부리마 올끼다”

“저 많은 계 가리 손님들을 우째 맨 입으로 기냥 보내겠노! 큰일이데이”

나는 마루가 불쌍하기도 했지만, 벌려 놓은 집안 일이 잘 안 될까 싶은 마음에, 저기쯤 서 있는 마루에게 손짓해 불렀더니,

어느새 마루는 꼬리를 내리고 다가와 내 볼을 핧으며 그 큰 몸을 내게 맡기는데,

옭아 맨 끈이라도 느슨하게 풀어 줄려고 하는 순간 누군가가 잽싸게 끈을 낚아채서 끌고 가는 게 아닌가!

마지막 단말마 소리를 끝으로 마루가 내 앞에서 죽어 갔다.

 

부릅뜬 마루의 눈을 피해 도망가듯 뒷산에 올라가 해 질녁까지 울다가 내려온 얼마 후,

나는 백리쯤 떨어진 안동사범 병설중학교로 유학을 떠났고,

마루 사건은 그 후로도 어린 나에게 트라우마가 되어

평생을 이렇게 심약하게 만들어 별 볼일 없는 늙은이로 만들어 놓은 것 같다.

마루야! 그 땐 너무 미안했어. 그런데, 천국은 분명 있는가 보다.

우리 할매한테 예전처럼 머릴 디밀고 어느 화가의 손으로 다시 나에게 나타난 걸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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