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
무언가로 인해 마음에 상처를 입을때면 당시에 겪었던 마음의 상처들이 떠오르고, 내가 죄책감을 느낄 때면 당시의 죄책감이 다시 돌아 온다. 그리고 내가 오늘날 무언가를 그리워하거나 향수를 느낄 때면 당시의 그리움과 향수가 되살아나곤 한다. 우리 인생의 층위들은 서로 밀집되어 차곡차곡 쌓여 있기 때문에 우리는 나중의 것에서 늘 이전의 것을 만나게 된다. 이전의 것은 이미 떨어져 나가거나 제처둔 것이 아니며 늘 현재적인 것으로서 생동감 있게 닥아온다 - The Reader by Bernhard Schlink.
Ⅰ
몇년 전 일이다,
유치원 다니는 손자의 봄 방학 동안 이곳저곳을 두루 함께 다니기로 작정 했던 참에 [덕수궁 한국 회화 100년 전] 구경도 같이 하기로 했다.
지하철을 타자마자 잠이 든 손자를 경로석에 앉혀 놓으니 고부리고 잠든 것이 가여운 생각이 든다.
제 어미가 인천에 약국을 내면서 맡기고 간 반년동안,
우리 식구 넷이 달라붙어서 밤에는 우리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 털 알레르기 때문에 고모가 데려가 재우고, 아침저녁 밥은 우리 집에 데려와 먹이느라 왔다 갔다 수선을 떨고 있는 게 예삿일이 아니다.
자던 손자를 깨워 들어 간 전시회장엔 벌써 많은 관람객이 그림들 앞에 서서 탄성을 질러 대고 있었다. 배운성의 〈가족도〉 였다.
그림 속에는 놀랍게도 60년 전 내 고향집이 고스라니 담겨 있었다. 할매가 돌쟁이 녹이를 안고 앉아 계시는 뒤에는 막내 삼촌 내외랑 녹이네 외삼촌도 와 계셨다.
사랑채 문지방 너머엔 우리 할배가 계시고, 맨 앞 할매 앞에는 꿈에서만이라도 한번 만나보고 싶었던 마루가 서 있다!
마루! 언젠가 부엌문으로 들어 와 어느덧 우리 식구가 되어 우리를 지켜 주고 있었던 녀석이었다. 마루는 식구들 중에 중학생이던 팔석이 아재를 제일 좋아 했는데,아재
주머니에는 어디서 났는지 늘 초콜릿이나 찐 우유 같은 구호물자가 들어 있어
나와 마루를 기쁘게 했다.
그러던 어느 몹시 무더운 여름날이었다.
오전반을 마치고 집으로 오던 동구 밖에 여느 때와는 다르게 달려 와 반기던
마루가 안 보인다. 배고프고 지친 내 십리 학교 길, 나를 반기며 기다려 주던 마루가 없다!
“팔석이 아잴 따라 갔나?”
불길한 생각으로 집에 가 보니, 아니나 다를까, 문중 어른들이 모여 계 가리 준비가 한창인데, 마루를 잡아넣을 큰 가마솥에 장작불을 지피고, 올가미 씌운 마루를 마악 공중에 매 달고 몽둥이질을 하려던 찰나였다.
그때였다, 마루의 눈이 마당에 들어 선 나를 발견하고서는 혼신의 힘을 다해 발버둥 치는 게 아닌가! 그 바람에 올가미 끈 잡은 어른 손도 맥없이 풀어져 마루를 놓치고 말았다. 그래도 착한 마루는 멀리 도망가지도 않고, 저만치서 우리 쪽을 보고 있었다.
“승회야, 니가 가서 마루를 불러 온나. 니가 부리마 올끼다.”
“저 많은 계 가리 손님들을 우째 맨 입으로 기냥 보내겠노! 큰일이데이.”
나는 마루가 불쌍하기도 했지만, 벌려 놓은 집안 일이 잘 안 될까 싶은 마음에, 저기쯤 서 있는 마루에게 손짓해 불렀더니, 어느새 마루는 꼬리를 내리고 다가와 내 볼을 핧으며 그 큰 몸을 내게 맡겼다. 가여운 마음에 옭아 맨 끈이라도 느슨하게 풀어 주려는 순간 누군가가 잽싸게 끈을 낚아채서 끌고 가는 게 아닌가! 마지막 단말마 소리를 끝으로 마루가 내 앞에서 죽어 갔다.
부릅뜬 마루의 눈을 피해 도망가듯 뒷산에 올라가 해 질녁까지 울다가 내려온 얼마 후, 나는 백리쯤 떨어진 안동사범 병설중학교로 유학을 떠났고,
마루 사건은 그 후로 어린 나에게 트라우마가 되어 따라다녔다.
“마루야! 그 땐 너무 미안했어.”
그런데, 천국은 분명 있는가 보다. 저렇게 우리 할매한테 예전처럼 머릴 디밀고 어느 화가의 손으로 다시 나에게 나타난 걸보면.
Ⅱ
얼마 전, 혼자 남아 고향 집을 지키시던 숙모가 뇌경색으로 쓰러지셨다.
아들들이 사는 서울 큰 병원에서 수술을 받고 큰 고비는 넘겼지만 더이상 걷지를 못하신다니 절박하기 그지없다.
아들 넷을 전부 서울로 장가 보내고, 10년 전 삼촌과 사별 후 혼자 사시다가 이런 일을 당하시니, 자식들이 더 이상 여기서 못 사시게 할 것 같다.
40여 호가 살던 내 고향 하한정 마을엔 지금 반 넘게 빈집들이다.
남아 있는 죽마회 여섯 동갑내기들도 살던 집을 버리고 시내 아파트에서 산다.
해마다 1월1일이면 우리 내외는 어김없이 이들 친구들을 보러 영주에 간다. 올해는 비워 둔 집과 무엇보다도 숙모랑 함께 살던 커다란 그 복실이가 궁금해서 하루 일찍 내려가 보기로 했다. 복실이는 북극 썰매 개 사모예드 흰색 암놈 대형견종이다. 심성이 착하고 순해 누구나 집에 오면 앞 강변 유원지나 연화산 등산로 길을 산책시킨다.
임시로 맡긴 조 서방네 농장을 들어서자 마자 오랜만에 만난 우리를 대번에 알아보고어쩔 줄을 몰라 하며 반기는데, 그 큰 앞발로 내 다리를 감싸 안고 놓아 줄 줄 모른다. 데려다 놓은 후 사흘 동안이나 식음을 전폐하고 숙모를 찾으면서 낯 설이를 했다는 말에 아내가 금새 눈물을 글썽인다.
작년에 왔을 때는 4학년이 된 손자가 목줄을 잡고 복실이 가는데로 따라서 연화산엘 갔다. 연화산은 우리 문중 산이다. 시에서 등산로를 닦아 놓아 새벽부터 사람들이 붐비는데, 시내를 벗어나 다리를 건너고, 마을을 지나 논 밭둑 길을 따라가면, 소나무 향기 가득 풍기는 완만한 산등성이가 이어지고 곧장 참꽃나무 오리나무 아카시아나무들로 철따라 장관을 이루기 때문이다.
길을 따라 가다가 보면 어느덧 할매 산소다.
할배도 두고, 대구 까지 따라 와서 나를 5.16 장학생으로 만드셨다.
“니는 공부마 해레이, 오뉴월 땡빚을 내서라도 돈은 내가 보내 주꺼시”
아버지 없는 이 조카에게 힘과 용기를 주셨던 삼촌도 거기 잠들어 계신다.
풀섶에 누워 저 멀리 우리가 올라 온 쪽을 내려다 본다.
지금 손자와 복실이가 촛대 바위 밑 할배 산소로 가고 있다. 길목 저기쯤에는 서울서 키우던 세리 무덤도 있다. 녹이네 쫑아가 낳은 새끼 중 제일 귀여운 것을 가져다 16년간이나 함께 살며 웃음과 행복을 주던 세리다.
겨울인데도 아지랑이 속 산등성이에는 온통 참꽃, 진달레 꽃밭이다. 방금 올라 온 산길로 귀엽고 앙증맞은 세리가 막 달려왔다! 그 뒤로는 동생을 업은 할매가 보인다. 바구니에 무언가 담아 와 내 입에 넣어 준다, 내가 좋아하는 곶감이다.
뒤 따라 온 마루가 내 볼을 핥는다.
덕수궁 그림 속 그 마루인가?
꿈인가 생시인가 아련한 그때였다, 손자가 흔들어 깨우는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 눈을 떠보니. 복실이가 내 뺨을 핥고 있었다.
산길을 내려 오며 저어기쯤 앞서가는 손자 등짝에 대고 소릴 질렀다
“이 할배 죽으마 너거 할매랑 여기 연화산에 묻어도고~ 알았제?” [끝]
글쓴이 박승회는
1946년 영주시 문정동 하한정 마을에서 태어나,
1969년 2월 영남대 공대 기계 공학과 5.16 장학생 수헤, 졸업후
ROTC 7기로 임관 전방 통신 소대장과 사단 통신 중대장 근무
1971년 전역후 태백 공고 교사 1.5년
1973년 현대 자동차 입사후 24년간 제조 부문 담당 이사
1997년 화승 알엔에이 입사후 6년간 부사장, 화승소재 대표이사
2003년 평화 산업 부사장 2년
2005년 CTNT 전기 자동차 기술 고문 2년을 역임 하였다.
(이 원고는 5.16 장학회 상청회 경북지부 창립 50 주년 기념 문집 문예 부문 응모 작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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